지금은 어떤 시스템으로 운영되는지 모르지만 우리가 한국에 있을 땐 ‘영아원’과 ‘고아원’으로 구분되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영아원은 5살 이하 부모 없이 버려진 아이들을 수용하는 시설이었고, 이 시설에서 6살이 되면 고아원으로 옮겨지는 그런 시스템이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고아원 침모(針母)로 들어가셨기 때문에 우리도 어머니를 따라 고아원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내 나이 6살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입대할 때까지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충남 예산에서 오신 ‘주’씨 성을 가진 보모가 계셨는데 그는 이렇게 버려진 아이들을 위해 잘 준비되어진 분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아이들에게 친엄마와 같은, 그리고 언니, 누나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니까 ‘보모(保姆)’로서 최적화된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아이들을 돌보며 들려 주는 이야기 가운데 잊히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주보모는 가끔 영아원으로 보내지지 않은 아이들이 고아원에 들어오는 경우들이 있는데 3살 이하의 아이들로 모두 다섯 명 정도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보모는 자신의 계획에 따라 이런 아이들을 하루에 한명 씩 번갈아 가며 같이 자기로 했습니다.
주보모는 아이를 자기 옆에 누이긴 했지만 피곤해서 그런지 금방 잠이 들곤 했는데 자다가 이상한 낌새가 있어서 눈을 떴더니 옆에 누운 아이가 밤새 잠을 자지 못하고 그 조그마한 손으로 자기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내렸다 하면서 몸을 떨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주보모와 같이 눕긴 했으나 태어나면서부터 한번도 엄마 품에 안겨보지도 못했고 엄마의 젖을 만져보지 못한 아이들이라 주보모 옆에 눕는 것이 어색했는지 그리고 본능적으로 엄마 젖이 그리웠는지 밤잠을 설치며 주보모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가 인기척이 있으면 놀래서 손을 내려 놓는 그런 일을 반복했는데 어제 밤에 데리고 잔 그 아이만 그런게 아니라 놀랍게도 거의 다 그런 반응을 보이길레 이런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리고 아이들이 불쌍해 죽겠다면서 눈물을 글썽이던 주보모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이런 시설에서 자라서 그런지 내가 만약 결혼한다면, 그래서 태어나는 아이가 있다면, 나는 그의 아버지로서 무한한 책임감을 가지고 사랑과 함께 그를 보호하리라는 것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부모로서의 당연한 생각이겠지만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라도 내 아들이 고아원에 보내진다는 것은 내 생애에선 없을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고아원에서의 생활이 고단했다든가 싫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부모형제 없이 이런 시설에서 자란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내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아원 아이들의 표정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얼굴에 웃음기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랫배가 불룩하게 나온 게 또 하나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배가 고픈 아이들이었습니다. 배가 고팠다기 보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이었기에 이들은 먹어도 먹어도 그 굶주림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먹을 게 있으면 양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의 아랫배가 부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의 바람을 하나님이 들어주셔서 우리 부부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둘이 우리의 사랑을 먹으며 우리 곁에서 잘 자라 주었고 지금은 큰아들은 목사로서, 작은아들은 Rice University에 Educational Technology Technician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음에 대해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어제 밤엔 나의 손자인 나다나엘이 우리집에서 하룻밤을 지냈는데 밤 1시경, 배가 고팠는지 잠을 자지 못하고 일어났습니다. 나도 어젯밤 먹은 게 좀 부족했는지 배가 고픈 것 같아 나다나엘과 같이 자다말고 밥을 챙겨 먹었습니다. 식사 후 서로 깔깔거리다가 이제 막 잠이 들기 시작했는데 나의 팔을 베고 누워있던 나다나엘이 느닷없이 내 입술에 뽀뽀를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가슴에 손을 살포시 얹어 놓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 할아버지가 좋아서 그랬나? 아니면 고마워서? 옛날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엄마처럼 챙겨주었던 주향래 보모가 생각났습니다.
나다나엘은 3살 때 우리 큰아들 조셉이 입양한 아들입니다. 백인 아버지와 히스패닉계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부모로부터 버림 받은 아이였습니다. 조셉 내외가 Group Home에서 그를 데려왔는데 나다나엘은 자폐증(Autism)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Foster Family로 정해진 시간이 다했을 때 마침 조셉은 캘리포니아에서 텍사스연회(Texas Annul Conference)로 파송되어 오는 과정에 나다나엘을 두고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아이를 끝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결단을 해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조셉 내외에게 있어서 나다나엘은 ‘중력’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의 밝은 미소와 사랑스러움에 조셉 내외는 거의 함몰되다시피 했습니다. 이런 나다나엘을 이제 와서 파양(破養)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지만 한편으론 나다나엘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입양하는 쪽으로 조셉의 마음을 결단케 했던 것은 나다나엘을 파양하면 틀림 없이 다시 고아원(Group Home)으로 보내진다는 사실을 알고 ‘그래,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아이를 책임질까?’하고 나다나엘을 자기 아들로 입양하고 휴스턴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조셉이 나다나엘에게 거는 유일한 희망은 그 속에 간직된 기쁨과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계속 기쁨과 빛을 가져다 주는 아이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조셉 내외가 나다나엘에게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이 처음 우리집에 왔을 때 내가 왜 남의 자식을 돌봐야 하는지 그리고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날 밤,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나다나엘을 한참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구약성경에 ‘라헬’과 ‘한나’가 성태(成胎)치 못함에 대해 울부짖는 내용이 그려져 있습니다.(창30:1-2, 삼상1:5, 19) 라헬과 한나의 태(胎)의 문을 열어 주심은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조셉 내외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나다나엘을 입양하게 되었는데 옆에서 잠 들어 있는 나다나엘을 끌어 안긴 했으나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벽’을 느꼈을 때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다나엘을 친손자로 생각하지 못한 마음을 나 자신에게 들킨 것 같아 이 녀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날 밤을 거의 뜬눈으로 지샜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밤은, 비록 자다가 배가 고파 일어나서 밥을 먹고 나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손을 내 가슴에 올려 놓고 세상 모르게 깊이 잠든 나다나엘을 바라보았을 때 세상에 이런 복된 아이가 어디 있을까 생각하며 그를 힘껏 끌어 안고 이젠 내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나다나엘, 너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천사야!” 목사인 엄마와 아빠, 그리고 목사인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 안에서 운명이 바뀐 그의 생을 축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피터 버거(Peter L. Berger)는 그의 저서 ‘천사들의 소문’(A Rumor of Angels)에서 ‘굶주리고 버려진 자들을 두고 하나님을 논(論)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마25:40)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혹 ‘인류를 사랑하자’는 유명인들의 말을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인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혹시 ‘인간’ 이면 몰라도…
내가 생각하는 ‘인류를 사랑하는 길’은 내 앞에 있는 이 한 사람,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나다나엘을 품고 사랑하는 것이 곧 인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피터 버거에 의하면 사방에서 ‘천사들의 소문’이 들려 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 즉 굶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이 곧 ‘나, 예수!’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고 돌보는 그것이 곧 예수님을 섬기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마25:31-46)
유양진목사
909-635-5515
yooy00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