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y 정순광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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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의 심장. 웅장한 모습으로 드러낸 조선초기의 건축물 경복궁이 건축된 것은 1395년(태조 4년)이었다.
조선왕조는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여 궁궐을 짓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였으며 주 책임자로 심덕부 (심온(세종의 장인)의 아버지)를 지정하여 건축하였으나 실제 건축을 추진한 사람은 환관 김사행으로 알려져 있다.
경복궁과 종묘가 완성된 직후 계속된 도성(都城) 축조 사업이 다음 해인 1396년 2월 28일에 완공되고 왕자의 난 등으로 인한 태조의 개경 천도로 어지러운 정치 상황속에서 경복궁은 궁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정종 이후 태종은 다시 개성에서 한양으로 재천도하면서 이궁인 창덕궁을 경북궁의 3분의1 정도의 규모로 건설해 조선 왕조의 궁궐과 도성이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왜 태종 이방원은 창덕궁을 지었을까? 이방원은 그곳에 기거하면서 집무를 하였다. 이는 그가 방석, 방번 두 형제의 목숨을 앗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경북궁에 서려 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나 궁궐의 위용이나 규모는 경복궁이 정궁이고 창덕궁이 이궁인 것만은 확실하다.
경복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다. 위치로 본 경복궁은 북문인 신무문을 나서 산자락을 올라 내려다보면 뒤로는 도봉에서 삼각산과 응봉을 거쳐 백악(북악)으로 내려오는 웅장한 산세가 든든하고, 앞으로는 개활지로 청계천이 가로질러 흐르며, 좌로 인왕산, 우로 낙산이 호위하고 있어 참 좋은 주변 지세와 절모하게 어우려져 있다.
경복궁의 이름은 시경에 나오는 구절을 태조가 읊조리자 정도전이 바로 명명했다는 야사도 있다.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 만년 큰복을 누리리라”의 맨 뒤의 이름인 ‘경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궁궐의 주요 부분으로 1번인 근정전(勤政殿)은 신하들의 조하를 받고 정령을 반포하는 정전으로 넓은 앞뜰이 조정으로 좌우 품계석에 따라 백관들이 늘어선다. 근정전 안에는 국왕이 좌정하는 옥좌가 있다.
사진 2번은 사정전(思政殿)으로 국왕이 평소 집무를 보는 곳이며 ‘깊이 생각하여 이치를 깨달아 정치를 펼쳐라는 뜻‘으로 왕의 책무를 다하는 곳이다.
3번 강녕전(康寧殿)은 국왕의 침전으로 서경(書經)에 나오는 5복 중 하나인 강녕(건강하고 평안함)에서 따왔다.
4번 연생전(延生殿), 경성전(慶成殿)은 강녕전 좌우에 있어 강녕전을 보좌하는 기능을 담당한 장소였다.
5번은 동궁(東宮)으로 세자가 거처하는 곳이며 동쪽에 있어 동궁이라 했는데 동궁은 곧 세자로 명칭이 굳어져 이후에 세자를 동궁으로 부르게 되었다.
6번 경회루(慶會樓)는 연못 속에 세운 2층 누각으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사용되어졌다.
7번은 궐내 각사로 주로 근정전 서쪽 행랑 밖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주방 의류 관계 부서 및 승지, 내시 등 국왕을 보좌하는 비서급 관리들의 처소, 중추원 3군부 등 왕실 수비대가 차지하고 있다.
8번은 광화문 밖 6조거리로 좌우에 의정부, 3군부, 6조, 사헌부 등 정부 주요 부서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렇듯 조선시대 경복궁은 자연과의 조화를 이상으로 삼아온 철학으로 주례(周禮)의 궁궐 축조 원칙을 적절히 가미하여 동쪽은 종묘, 서쪽의 사직단, 남북 일직선상의 궁궐 구조를 이루어져 있다. 또한 전마다 문과 행랑으로 엄격하게 구분해 놓은 것을 통해 새 왕조가 분수와 질서를 중시하는 유교 국가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초기 축조물인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 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다시 중건되고, 일본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지어졌다. 이후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제거하고 광화문을 옮겨와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