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희생으로 지켜낸 자유 민주주의의 소중함 전달

By 변성주 기자
kjhou2000@yahoo.com
한국전 70주년 맞는 2020년, 특히 한국전 참전용사들에게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큰 해이다. 70주년의 역사가 이어지는 동안 참전용사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남아있는 참전용사들도 대부분 90세 전후의 노병이 되었다. 휴스턴 한인사회에서도 올해 휴스턴 6.25참전용사국가유공자회 정재명 회장이 별세했고, 70주년 기념행사도 코로나19로 인해 8.15 광복절 기념식 뒤에 약식으로 거행했다.
70년 전 인천상륙작전이 수행된 주간이었던 16일(수)에는 당시 한국전 발발부터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 휴전에 이르는 한국전쟁의 긴박한 역사 현장에서 조국 수호의 책임을 다했던 휴스턴 거주 한국전 참전용사 국가유공자를 만나 전쟁의 체험담을 듣는 자리가 마련됐다.
이날 자리는 9월부터 재향군인회 미중남부지회를 다시 맡고 있는 김진석 회장의 주선으로 마련됐는데,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강동구 지회장을 15년간 역임했던 한인동포 한승주 씨도 배석했다.
올해 92세의 이명기 국가유공자는 휴스턴 거주 6.25참전국가유공자회원 중 가장 고령이었는데, 특히 한국전쟁 중 어깨에 포탄을 맞아 4개월간 병상에 누워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건강하고 꼿꼿한 모습이었다.
재향군인회 미중남부지회 주선
인천 상륙 작전은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15일 UN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의 주도로 진행된 상륙작전이다. 이 작전에는 7만 5천여 명의 병력과 261척의 해군 함정이 투입되었고, 2주 후 유엔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은 남쪽인 낙동강 방어선에서 힘겨운 방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인천은 낙동강과 부산 교두보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조선인민군이 거의 방어를 하지 않고 있었다. 이곳에 기습 상륙 작전을 개시함으로써, 유엔군은 손쉽게 인천을 점령하여 서울까지 탈환했다. 9월 13일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명령에 의해 인천 상륙 작전이 개시되었다. 15일 대한민국의 백인엽 대령이 합동으로 상륙작전을 수행하면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인천에 진입하였다. 이명기 국가유공자는 바로 백인엽 대령이 지휘한 대한민국 국군 제17연대 소속 연대본부 통신보급정비 하사관이었다. 6.25 전쟁 발발 당시 22세로 황해도 옹진 17연대 소속 군인 신분이었던 그는 당시만 해도 전쟁이 이렇게 큰 규모로 확대될지 상상하지 못했고, 인천상륙작전 시행 당시에도 부산에서 배가 일본으로 간다고 했지만 목적지는 인천항이었다고 회고했다.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하기 전 조선인민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월미도를 두 번이나 전투기로 공습하고 포격했는데, 당시 17연대가 월미도에 도착했을 때는 예전의 식당과 위락시설이 있었던 유원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고 기억했다.
미국 군함의 맹렬한 포격과 전투기의 공습이 있은 다음에는 미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이후 육군으로서는 유일하게 17연대가 후방을 책임지면서 퇴각하는 북한군을 섬멸하고 이후에 서울 치안유지에 앞장선 주력부대였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명기 참전용사는 퇴각하는 북한군이 쏘는 총탄에 어깨 부상을 입었지만, 이후에도 후방에서 군인의 임무는 계속했다고 말했다.
지난 1979년 휴스턴에 있던 가족의 초청으로 도미한 이명기 6.25참전국가유공자는 슬하에 2남2녀의 다복한 가정을 두었고,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킨 지금도 손수 운전은 물론 매일 7시에 기상해 하루 3마일을 걷고 코로나19 이전에는 탁구도 즐기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70년 전의 긴박했던 전쟁 상황들을 마치 일지를 읽어 내려가듯 날짜와 장소, 전투상황 등을 어제 일처럼 상세하고 정확하게 들려주는 92세 노병의 이야기는 굳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발발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과 자유 민주주의 수호의 정신을 마음속에 새겨주었다.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노병은 70년 전 총탄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도 목숨을 건졌고,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지금까지 어떤 위험 앞에서도 담담히 운명을 마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