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그리워> 등 민족음악 선구자 채동선 작곡가 장남
By 변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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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9일 제 574돌 한글날을 맞아 휴스턴 현지 사회에서 한국어 보급을 위해 묵묵히 기여해온 채영철 박사(88세, 화공학 박사)와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6.25 참전 국가유공자인 채영철 박사는 한국전이 발발하던 때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1학년 재학 중이었다가 전장으로 향했다. 한국전쟁이 그에게 더욱 슬픈 역사였던 것은 대한민국 작곡가이자 바이올리스트였던 부친 채동선 씨가 부산 피난 중 병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부친 채동선(1901~1953) 작곡가는 일제강점기 시인 정지용이 노랫말을 쓴 유명 가곡 <고향>의 작곡가다. 조선 최초의 현악 4중주단을 결성했고, 전통민요 채록에도 열정을 쏟으면서 창씨개명은 거부했던 민족음악가였고, 대표작으로 가곡 <고향>외에 <향수>, <망향>, <모란이 피기까지>, <바다> 등이 있고, 합창곡 <또 다른 하늘>, 교향곡 <조국>, <한강>, <현악 4중주곡 제 1번>, <현악 4중주곡>,<바이올린 소나타>, <현악 모음곡> 등이 있다.
채영철 박사는 수도사단에서 통신중대 보급장교로 공비토벌에도 참여했다가 1953년 육군 중위로 정식 제대했다. 이후 전쟁 통에 못다한 학업을 미국에 도미하여 화공학 박사학위까지 취득했고, 곧장 미주리주 샌루이스 몬산토 (Monsanto Co.) 본사에 입사에 40여년 간 근무했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나중에 동경지사 설립을 맡았고 지사장을 역임한 후 지난 2002년 은퇴했다. 아내 주숙현 씨와의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는 채영철 박사는 아들이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휴스턴으로 2002년 이주했다.

외국인 상대 우리글 교육에 일익(一翼)
채 박사가 휴스턴으로 이주했던 당시 휴스턴 커뮤니티컬리지(HCC)에서는 외국어 과목 중 한국어 학과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채 박사에게 의뢰가 들어왔고, 이후 컨설턴트로 학과 개설을 도왔다가 학교 측의 요청으로 수업까지 맡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한국어 강좌가 올해 2020년 6월까지 14년간 이어졌다. 몸이 아파서 딱 하루 결강을 했던 것을 제외하곤 일주일에 월요일과 수요일 하루 3시간씩 수업을 14년간 거의 쉬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성실함과 책임감, 한국어 교육에 대한 드러나지 않은 열정은 깊은 뿌리로 남아있다.
현재 HCC 의 스페니쉬, 프랑스어, 독일어 등을 비롯한 외국어 강좌 프로그램 중에서 한국어 강좌는 스프링브랜치 캠퍼스에서만 강의하고 있다. 특히 HCC의 Carlos Villacis 외국어과장은 채 박사와도 친분이 깊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외국어 강좌는 수시로 강사가 바뀐다거나 하여 애를 먹을 때가 많았는데 채 박사의 한국어 강좌는 커리큘럼 개설부터 한 명의 강사가 꾸준히 14년을 이끌어오면서 두터운 신뢰가 쌓였던 것이다.
한국어 강좌에 등록하는 학생수는 보통 30명 정도로 꾸준하다고 한다. 굳이 K-pop의 인기가 아니더라도 한국어 강좌의 인기 이유는 첫째, 저렴한 비용으로 4학점을 취득할 수 있고 미국내 어느 대학에서도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며 둘째, 한국에서 영어 강사로 활동하길 원하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필요한 대학수준의 기초 한국어 수업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주로 베트남 학생들이 25~30% 차지하고, 중국 학생들도 많은 편이었는데,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인 2, 3세 학생들이 많지 않았던 사실이 늘 아쉬웠다”고 말하는 채영철 박사는 이민가정에서 성장하거나 태어난 자녀세대들의 한국어 교육이 보다 적극적이어야 할 것이라는 조언을 잊지 않았다. 현재 휴스턴에서 대학 교육기관에서 한국어가 정식 과목으로 개설된 곳은 라이스대학과 HCC가 있는데, 휴스턴대학에도 조만간 한국어 강좌가 정식 과목으로 개설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젊어서는 절체절명의 나라의 위기 앞에서 자유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싸웠고, 화공 엔지니어로서 40여년 세월을 회사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인생 후반기에는 88세의 나이까지 아름다운 우리말 한국어 보급을 위해 밤 운전을 마다하지 않으며 교육에 정진했던 채영철 박사는 지금도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거의 서가에서 책과 벗하며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어떤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하며 자족(自足)하는 그의 삶. 특히 ‘우리 것’을 사랑하고 보존하는 자세는 바로 민족음악의 선구자였던 부친 채동선 씨의 족적과도 맞닿아 있었다.